4. 선불교와 만난 스위스 유학시절

모교인 감신에서 나의 교편생활은 주로 불트만적인 실존론적 신학의 소개를 중심한 것이었다. 젊음을 강의 준비에만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도 그만큼 열심히 받아 주고 있었기 때문 이다. 우수한 학생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뜨루에서 익혔던 현대 철학과 현대문학과 내 강의를 풍부하게 하였다.
교편생활은 즐거웠으나 내 사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에 직 면해 있었다. '65년에 암으로 아내가 돌아간 후 내게 남겨진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활이 정리된 것은 이대에서 철학 을 강의하던 신옥희님을 만났을 때(1968년 여름)부터였다. 님은 내 생애의 반려자가 되었다.
뜨루에서 스승으로 모셨던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후릿츠 부리 교수의 호의로 우리 부부가 바젤대학교를 찾아갔던 것은 1971년 가을이었다. 아들 셋은 외할머니가 맡아 주었다. 라인 강 상류에 있는 바젤은 인구 20만의 옛 문화와 새로운 공업 문명이 엇갈리 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바젤은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만나 고 있는 세 나라의 접경지이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학위가 끝나는 1976년 2월까지 꿈에 그리던 스위스 유학생활을 하게 되 었다.
우리 부부는 도착한 지 한달 만에 박사 논문제목을 제출하였 다. 아내의 연구는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과 원효의 대승신 앙과의 비교"였고 내 논문 제목은 "선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의 관 점에서본 그리스도의 궁극성-칼 마이켈슨, 야기 세이찌(八木成 一), 후릿츠 부리"였다. 우리 부부는 이 해부터 시작된 불교연구 를 주로 일본과 영국 그리고 독일에서 구한 자료에 의하여 성숙 시켜 나갔다.
내가 동양사상과 만나게 된 동기는 미국 뜨루대학교에서 야 스퍼스 계통의 신학자 후릿츠 부리를 만나면서부터 였다. 80세 기념으로 출판한 야스퍼스의 "계시에 직면한 철학적 신앙"을 교 재로 쓰면서 강의해 나가던 바젤대학교에서 온 초청교수 부리의 새로운 신학적 어프로치는 실존론적 신학의 가능성을 보여 주기 도 하였다. 두 가지 의미에서다.
첫째는 마이켈슨이 지시한 고가르텐과 에벨링의 방향, 곧 불 트만 신학의 두 초점인 케리그마와 실존 가운데서 케리그마를 철 저화시키는 방향이 아니고 실존의 입장을 철저화시키는 좌파의 방향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야스퍼스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부리 신학과의 만남에 서 나는 내 신학의 지평선에 동양사상 특히 대승불교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불교사상을 익혀 나가는 데 정비례하여서 나는 이제까지 공부하였던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 야스퍼스 의 실존철학이 의도하였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더 분명히 깨닫 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이켈슨에게서 배웠던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의 위대함과 그 한계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 같았다. 동과 서가 내 안에서 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르트의 후계자로 31세의 약관으로 바젤에서 강의하기 시작 한 후기 하이데거와 신학을 만나게 하려던 하인리히 오트와 야스 퍼시아너인 후릿츠 부리는 우리 부부가 온 이래로 "동양사상"이 라는 새로운 과정을 열고 선불교 고전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도겐(道元)의 正法眼藏과 碧巖錄을 비롯하여서 경도학파의 불 교철학자들(西田 幾太郞,田邊 元, 西谷啓治)의 저작을 함께 일기 시작한 것이다. 오트의 조수인 웃데도 이 세미나의 고정멤버였다. 우리는 이과정에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오토와 부리 사이에서 철학적 신학적 사색을 깊게 할 수 있었으며 동양사람이라는 아이 덴티티를 실존적으로 실감하면서 동과 서의 한계를 오고갔다. 헤 르만 헤세의 아저씨였으며 일본 선교사로 와 있으면서 한물을 배 우고 귀국하여 경도학파 불교철학자 碧巖錄을 독일어로 번역한 군데르트가 일본에서 온 젊은 신학도에게 주었던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하여 불교를 배 우고 좋은 불교도가 되기 위하여 기독교를 공부하고 있다.""기독 교는 유에 사로잡혔고 불교는 무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서양 신학자들이 플라톤주의자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또는 실존주의 자이면서 좋은 크리스챤이었던 것처럼 동양신학자들이 기독교나 기독교적 불교를 말할 수 있을까? 불교로 특징화 할 수 있는 동 양이라는 문화적 풍토에서 기독교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 서재에는 유명한 중국 선불교의 논쟁이 낳은 神秀와 慧能의 시가 걸려있었다. 나는 이 두 禪詩 속에서 야스퍼 스와 하이데거, 부리와 오트를 읽기로 했다. 바젤대학교 신학부는 지금은 4부작으로 출판되었지만 "대화 속의 교의학"이라는 제목 으로 부리와 로호만과 오트가 공동 강의하고 있었다. 야스퍼스 철학과 네오마르크스주의와 후기 하이데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세 신학자가 같은 제목으로 서로 다른 전개를 하여 나가는 이 강의는 아주 자극적인 과정이었다. 바르트가 너무 커서 거의 신 학이 획일화되던 신학적 일원시대를 벗어나서 새로운 신학적 다 원시대를 열려고 하는 몸부림이었다. 루째른에서 온 카톨릭 신학 자와의 강의도 이채로웠다. 칼 라아너나 철학자 가다머의 강연을 듣고 가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라아너의 "익명의 크리스챤" 사 상은 큰 충격을 주었다. 바티칸 제2공의회의 "교회헌장"(16항)은 타종교인과 무신론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스도 복음 및 그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시란 마음으로 신을 찾고 양 심의 명령을 통하여 인정된 신의 의지를 은총의 역사 속에서 행 동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신은 그 섭리에 근 거하여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는다." 앙리 쥬므앙과 에마노렛 랏쌀, 토마스 머어튼과 함께 "기독교적 선불교"의 저자 죤스톤을 알게 된 것은 이때였고 기독교적 "불교적 기독교"를 지 향하는 미국의 자랑스러운 감리교 신학자 존 캅을 알게된 것은 귀국 후의 일이었다. 죤 캅은 한국교회의 생명력을 불교, 유교, 샤머니즘에 으히ㅏ여 결정된 한국문화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 으로 보며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한국적인 신학을 전개시킴에 있 어서 이러한 본원적인 데서 출발하여 한국적인 전통에 적합한 성 령의 힘을 개발시켜야 될 줄로 믿는다."고 역설하였다.(Ex Oriente Lux;빛은 동방에서)